불에 달궈 지지는 그림 '낙화(烙畵, 인두화)', 그 원조는?
불에 달궈 지지는 그림 '낙화(烙畵, 인두화)', 그 원조는?
특색(特色)이 있는 낙화(烙畵)
조선에서 발명되어 조선에서 발달된 것
지금은 박씨 한 사람
<매일신보> 1918년 11월 5일자
대정 삼년(대정 4년의 착오, 즉 1915년) 공진회 때에 낙화(烙畵, 인두로 지지는 그림)의 명인으로 찬양을 많이 받았던 전라북도 진안군에 거주하는 박병수옹(朴秉洙翁)은 지난달 31일에 다시 경성에 올라와 송현동(松峴洞) 56번지에 두류하여 있는데 이번에 삼경함은
<> 그 노인의 연령이 금년 육십이라, 후세 청년에게 그리는 법을 전하라는 뜻으로 백작 이완용씨의 상경하라는 권고를 받아 온 것이라는데 이 낙화라는 그림은 원래 다른 그림 모양으로 청국이나 서양에서 전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박씨의 조부 박창규(朴昌珪)라는 이가 스스로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라 하며 외국에도 낙화가 있기는 있으나 혹 나무쪽에나 대나무에다가 그리는 것이요, 조선의 낙화모양으로
<> 종이에 그리는 것은 없는 터이라. 불에 달은 인두를 가지고 나무나 대를 지져서 그림을 그리기는 용이한 일이지만은 얇은 종이에다가 종이는 상하지 않고 그림은 되도록 그리기라는 것은 보기에는 매우 용이할 것 같아도 실지로 하여 보면 특별한 묘득을 얻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인즉 이 낙화 한 가지 조선에서 특히 발달된 그림으로
<>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다. 그러한 까닭으로 이 그림이 발명된 뒤로 백년이래에 배운 제자도 적지 아니하건만은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박씨의 부친도 배우기는 하였으나 확실한 성공은 하지 못하였고 박씨는 어려서부터 이 그림에 취미를 얻고 또 재주가 탁월하여 십팔세 되었을 때부터 세상에 그림을 내어놓게 되었는 바 기시에 진안현감으로 있던 김승집씨에게
<> 매우 칭찬을 받고 김홍집씨의 소개로 일본에까지 그림을 보내게 됨에 박씨는 더욱 기뻐하여 큰 성공을 하여볼 작정으로 오늘까지 사십여년이나 그림그리기에 종사하여 지금은 구미 각국에서까지 주문이 오도록 성공을 한 것이더라. 그리고 장래 그 노인의 뒤를 이을 듯한 유망한 제자는 전주군에 사는 백남철(白南哲) 이십세 된 청년인데 서화가 똑똑하여 부지런히 힘쓰면 박옹의 뒤를 이어 낙화의 생명을 유지하겠더라.
[사진설명] 낙화 ... 박병수옹의 그림
조선낙화회(朝鮮烙畵會)
<시대일보> 1924년 9월 7일자
조선낙화(朝鮮烙畵)는 거금(距今) 60년전(年前)에 박초산(朴蕉山)이 발명(發明)하였으나 아직 세상(世上)에 유행(流行)되지 못함을 일반(一般)이 유감(遺憾)으로 생각하는 바 사계(斯界)에 유일(唯一)한 유예(遺詣)가 유(有)한 청년 대화가(靑年 大畵家) 백학기군(白鶴起君)이 당지(當地)에 내도(來到)하여 유지제씨(有志諸氏)의 발기(發起)로서 낙화대회(烙畵大會)를 작(昨) 6일(日)에 상업회의소 누상(商業會議所 樓上)에서 개최(開催)하였다고.
(정리 : 2006.9.4, 이순우, http://cafe.daum.net/distorted)
(*) 낙화(烙畵)라고 하여 수학여행 때 관광지 기념물 가게 같은 데서 많이 보는 인두그림인 줄 알았더니, 그것과는 다르게 종이를 살짝 태우듯이 그리는 그림도 있었던 모양이다. 그런데 종이에 불기가 닿았다면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보관하는데 문제가 있었을 것 같은데, 세월이 조금만 흐르더라도 그림이 금세 바스라져 버리지 않았을까?